직장 동료 중에 삼성전자 협력사에 다니는 분이 있습니다. 얼마 전 그분이 "광주에 팹 짓는다는 게 사실이냐"며 제게 물었는데, 저도 처음엔 반신반의했습니다. 삼성 반도체 공장이 수도권 밖에 들어서는 건 창사 이래 처음이라고 하니,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노조까지 나서 노사정 협의를 제안하면서 상황이 더 복잡해졌습니다. 이 사안을 찬찬히 뜯어보니 단순한 공장 이전 뉴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사정 협의 제안, 노란봉투법이 바꿔놓은 판
삼성그룹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지부(이하 초기업노조)가 7월 1일 공식 입장문을 냈습니다. 핵심은 하나입니다. 정부, 회사, 노조가 한자리에 앉는 노사정 협의체(勞使政 協議體)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노사정 협의체란, 노동자·사용자·정부 세 주체가 공식 테이블에 모여 주요 의제를 함께 논의하는 구조를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임금이나 고용 안정 같은 거시적 의제에서 활용되는 방식인데, 이번엔 특정 기업의 신규 팹(FAB) 건설 계획이 그 대상이 됐다는 점이 달랐습니다.
제가 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노조가 왜 여기까지 개입하려 하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공장 입지를 어디에 정하느냐는 경영진의 고유 권한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올해 3월 시행된 개정 노동조합법, 이른바 노란봉투법을 보고 나서 이해가 됐습니다. 노란봉투법이란 노조의 쟁의 행위 대상을 기존의 임금·근로 조건에서 '사업 경영상 결정'까지 넓힌 법률 개정안입니다. 쉽게 말해 신규 공장 건설이나 생산라인 재배치처럼 근로 조건과 직결되는 경영 결정에도 노조가 교섭 테이블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 겁니다.
이번 초기업노조의 제안은 그 법적 근거를 실제로 행사한 첫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재계에서도 이 부분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개정 노동조합법 시행 이후 이런 방식의 협의 요구가 반도체 업계 이외 다른 제조업으로도 확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고용노동부]
노조가 이번 입장문에서 사용한 표현 중 제 눈길을 끈 것은 "천금매골(千金買骨)"이라는 고사성어였습니다. 천금매골이란 인재를 얻기 위해 정성을 다한다는 뜻으로, 죽은 명마의 뼈조차 천금을 주고 사서 살아있는 명마를 불러 모은다는 고사에서 유래했습니다. 반도체 인재 확보가 그만큼 절박하다는 메시지를 담은 셈인데, 처우 개선 요구를 이렇게 포장해서 내놓는 방식이 꽤 영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조가 이번 입장에서 강조한 핵심 요구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산업 안전 기준의 선제적 확보 (신규 팹 가동 전 안전 인프라 구축)
- 광주 이주 조합원 대상 주거 환경 및 생활 인프라 지원
- 핵심 인재 유지를 위한 처우 개선 및 과감한 투자
- 부지 선정부터 가동까지 장기적 관점의 철저한 준비
[사진출처 : 매일경제]
메가 프로젝트의 규모와 현장의 현실 온도차
이번 사안의 배경이 된 대한민국 대도약 메가 프로젝트는 민간과 정부가 반도체 등 국가 신성장 산업에 총 4,755조 원을 투자하는 계획입니다. 삼성그룹만 해도 국내에 2,655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고, 그중 삼성전자는 반도체 분야에만 2,430조 원을 쏟아붓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평택 캠퍼스, 용인 국가산업단지, 그리고 이번에 새로 추가된 광주 반도체 클러스터가 그 무대입니다.
숫자만 보면 압도적입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반도체 업계 관련 현장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숫자와 현실 사이의 온도차가 꽤 크다는 걸 느낍니다. 전공정 팹(前工程 FAB)을 짓는다는 건 단순히 건물을 올리는 일이 아닙니다. 전공정 팹이란 웨이퍼(wafer) 위에 회로를 새기는 반도체 제조의 핵심 공정을 담당하는 생산 시설로, 초고순도 전력과 용수, 극도로 정밀한 클린룸 환경이 필요합니다. 이런 인프라를 광주에 새로 구축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과 준비가 필요합니다.
초기업노조가 "최소 5년 이상 걸리는 긴 여정"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대형 국책 프로젝트가 발표 이후 실제 가동까지 초기 계획 일정을 지킨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사례만 봐도 인허가와 용수 확보 문제로 지연된 바 있습니다. 삼성전자 내부에서도 이미 "광주로 발령 나면 어떤 조건이냐"를 추정하는 글이 돌았다고 하니, 현장 직원들의 불안감은 생각보다 큰 모양입니다.
클린룸(clean room) 환경도 짚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클린룸이란 공기 중 먼지 입자 수를 극도로 낮게 통제한 반도체 제조 전용 공간을 말하는데, 나노미터(nm) 단위의 회로를 새기는 첨단 공정에서 먼지 한 톨은 수십억 원짜리 웨이퍼를 불량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수준의 환경을 광주 신규 부지에서 구현하려면 전력망 안정성, 지반 진동, 용수 수질까지 세밀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국내 반도체 설비 투자 현황을 보면 이런 기반 인프라 구축에만 통상 2~3년이 소요된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출처: 한국반도체산업협회]
결국 노조가 "조급함보다 철저한 준비"를 강조한 건 단순한 수사가 아닐 수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 부분이 이번 입장문에서 가장 실질적인 내용이라고 봅니다. 발표의 규모와 실제 실행 속도 사이의 간극을 가장 잘 아는 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정리하면 이번 초기업노조의 노사정 협의 제안은 단순한 처우 개선 요구 그 이상입니다. 노란봉투법이라는 새로운 법적 토대 위에서, 경영 결정의 영역으로 노조의 목소리를 확장하려는 첫 본격적 시도로 읽힙니다. 메가 프로젝트가 말 그대로 '대도약'이 되려면 숫자 발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광주에서 실제로 일하게 될 사람들의 주거, 안전, 처우가 함께 설계돼야 한다는 노조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노사정 협의체가 실제로 구성될지, 구성된다면 어떤 의제를 다루게 될지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 :
https://v.daum.net/v/20260701225404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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