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고지서 한 장을 받아들고 멍해진 경험, 한 번쯤 있지 않으신가요. 저는 몇 해 전 부모님 명의 소규모 건물을 정리하면서 예상보다 훨씬 큰 세금 계산서를 보고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상속세가 얼마나 무거운 현실 문제인지 실감했습니다. 삼성가가 5년에 걸쳐 12조 원이라는 천문학적 규모의 상속세를 완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감각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숫자의 스케일은 비교조차 할 수 없지만, 세금 앞에서 느끼는 무게감만큼은 같은 결이었습니다.
오너십 경영과 전문경영인 체제, 어느 쪽이 진짜 혁신을 만드나
이번 상속세 완납을 계기로 재계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화두가 있습니다. 바로 오너십(Ownership) 경영의 가치입니다. 여기서 오너십 경영이란 창업 가문이나 대주주가 직접 경영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방식을 말하며, 전문경영인(CEO) 체제와 자주 대비됩니다. 전문경영인 체제는 주주가 선임한 외부 전문가에게 경영을 위임하는 구조로, 단기 실적과 주주 이익 극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를 보면서 "전문경영인 체제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논리가 삼성 같은 첨단 제조업에는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다고 봅니다. 소프트웨어와 플랫폼 중심의 미국 빅테크는 설비투자 부담이 상대적으로 낮고 M&A(인수합병)로 기술 공백을 빠르게 메울 수 있는 생태계가 갖춰져 있습니다. 반면 삼성전자 같은 반도체 장치 산업은 매년 수십조 원 규모의 CAPEX(자본적 지출)가 필요합니다. CAPEX란 공장 증설이나 첨단 장비 구매처럼 미래 수익을 위해 지금 집행하는 대규모 투자 비용을 뜻합니다. 이런 투자는 타이밍이 조금만 어긋나도 경쟁에서 결정적으로 뒤처질 수 있어 과감하고 신속한 의사결정이 생명입니다.
실제로 전문경영인 체제가 초래한 반도체 패권 이동은 이 논리를 뒷받침합니다. 과거 압도적인 1위였던 인텔은 CEO 체제 전환 이후 미세공정(Fintech 기반 나노 단위 회로 구현 기술) 전환 타이밍을 놓치면서 TSMC와 삼성전자에 주도권을 내줬습니다. 마이크론 역시 반도체 사이클에 따라 보수적으로 투자를 축소하는 관리형 전략을 반복했고, 결국 HBM(고대역폭 메모리)이라는 차세대 제품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에 뒤처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HBM이란 여러 개의 D램 칩을 수직으로 적층해 데이터 전송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인 고성능 메모리를 말하며, AI 가속기 시장에서 핵심 부품으로 부상한 제품입니다.
물론 대만 TSMC는 창업주 퇴임 이후에도 전문경영인 체제로 독보적 위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파운드리(위탁 생산) 단일 사업에 극도로 집중된 구조인 데다, 대만 정부의 전폭적인 국가 지원이라는 든든한 기반 위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삼성처럼 반도체·스마트폰·금융·유통을 아우르는 복합 대기업에 TSMC 모델을 그대로 이식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상속세 완납 과정에서 제가 주목한 부분은 이재용 회장의 행보였습니다. 다른 유족들이 블록딜(대량 주식 매각)과 주식담보대출을 병행한 것과 달리, 이 회장은 단 한 주도 팔지 않고 배당금과 개인 신용대출만으로 2조 9,000억 원의 상속세를 감당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지배력 유지와 책임 경영을 동시에 실천한 방식으로, 오너십의 무게를 몸소 보여준 장면이라고 봅니다.
가업승계 세제, 12조 완납이 던진 진짜 질문
삼성의 이번 납부액은 2024년 대한민국 전체 상속세수의 절반을 넘는 규모입니다([출처: 국세청](https://www.nts.go.kr)). 단일 가문의 납세가 국가 재정에 이 정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현행 세제의 구조적 문제를 다시 한번 드러냅니다. 현재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최대주주 할증평가를 포함해 60%에 달합니다. 여기서 최대주주 할증평가란 지분율이 높은 오너의 주식을 상속할 때 경영권 프리미엄을 감안해 평가액을 20% 추가로 높이는 제도입니다. 이렇게 되면 실질 세율이 60%를 훌쩍 넘어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 됩니다([출처: OECD](https://www.oecd.org)).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세금이 높다는 사실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한국 오너들의 자산이 현금이 아닌 지분에 집중돼 있다는 구조적 특성입니다. 상속세를 내기 위해 주식을 팔면 지분율이 희석되고, 희석된 지분은 적대적 M&A나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에 노출되는 빌미가 됩니다. 행동주의 펀드란 기업 지분을 매입한 뒤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경영진 교체 등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며 단기 주가 상승을 유도하는 투자 전략을 구사하는 펀드입니다. 기술 경쟁력이 있는 기업이 세금 충격을 버티지 못해 경영권 위기에 몰리거나 핵심 사업을 매각한다면, 그 손해는 결국 국가 경제 전체로 돌아옵니다.
일본의 사례가 여기서 자주 언급됩니다. 일본은 후계자가 주식을 승계할 때 상속세와 증여세를 전액 유예해 주는 가업승계 세제 특례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그 결과 업력 100년 이상 기업이 4만 곳을 넘습니다. 도요타처럼 도요다 가문의 영향력 아래 하이브리드 기술과 친환경차에 조 단위 장기 투자를 단행할 수 있는 기반도 이 제도 덕분이라는 분석이 많습니다.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 역시 5대에 걸쳐 100년 넘게 기업 제국을 유지하며 투명 경영과 사회 공헌으로 오너 경영의 긍정적 사례로 꼽힙니다.
이번 상속세 납부와 함께 이어진 사회 환원 역시 규모가 남다릅니다. 핵심 항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국립중앙의료원에 7,000억 원 출연 → 국내 최초 중앙감염병병원 건립 재원으로 활용
- 서울대학교병원에 3,000억 원 기부 → 소아암·희귀질환 환아 2만 8,000여 명 혜택
- 국보급 미술품 등 2만 3,000여 점 국가 기증 → 이건희 컬렉션 순회전 누적 관람객 350만 명 돌파
12조 원의 세금과 약 10조 원 규모의 문화 자산이 국가 재정과 공공 인프라로 흘러들어간 셈입니다. 재계 일부에서 "사업보국(事業報國) 철학의 완성"이라고 평가하는 이유입니다. 저도 이 부분만큼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실질적 사회 환원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제가 직접 이번 사안을 들여다보면서 든 생각은, 삼성이 이걸 해낼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삼성이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중견기업이나 기술 중심 가족기업이라면 같은 세율 구조에서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한미약품처럼 상속세 부과 시점의 주가보다 이후 주가가 급락해 세금이 자산 대비 훨씬 과중해지는 사례도 현실에서 이미 벌어졌습니다.
삼성의 12조 원 완납은 분명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현행 상속세 체계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사례가 아니라, 오히려 그 한계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세 형평성이라는 공익적 목적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고용과 기술 투자를 전제로 상속세 부담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세제 개편 논의가 지금 당장 시작돼야 한다는 신호로 읽힙니다.
삼성이 이 전례를 남긴 만큼, 다음 차례는 정책 당국의 응답이어야 합니다. 첨단 제조업의 경쟁력이 세금 구조 때문에 흔들리지 않도록 제도적 뒷받침을 정교하게 설계하는 것, 그것이 삼성의 12조 납부가 우리 사회에 남긴 진짜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분석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세무·법률 조언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상속·세무 문제는 반드시 전문가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